레나타 살레츨 “‘불안’ 동력삼아 사회변화 이끌어야”
“한국 여성이 경험한 불안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킬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슬로베니아 출신 사회학·정신분석학자인 레나타 살레츨 미국 예시바대 교수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이후 추모 분위기에서 사회변화의 단초를 봤다고 했다.
살레츨 교수는 8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사건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으로 인한 동요다. 살해당한 여성과 자기를 동일시한 건 자신이 가진 딜레마를 사건에 투영해 풀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불안을 중심으로 현대사회를 관찰한 저서 ‘불안들’로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불안을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인간의 본질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불안 심리를 이용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 여성이 느끼는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여성 상대 폭력·혐오에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봤다.
살레츨 교수는 “권력구조 자체가 굉장히 불안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다른 ‘긍정적 불안’의 사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들었다. 협상 과정에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협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됐다. 이런 형태의 불안은 증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살레츨 교수는 현대사회의 불안을 ‘선택 이데올로기’와 연결지어 설명했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의 주된 이데올로기를 ‘선택’, 즉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실제로 선택지는 제한돼 있을뿐더러 책임을 개인에게 물어 실패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사회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아주 효과적으로 봉쇄하는 역할을 해왔다”며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노력이 일중독·거식증·과식증 같은 ‘자기파괴’로까지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그는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사회 조직을 원하는지 질문하는 게 우리의 무지를 극복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살레츨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한 이른바 ‘슬로베니아 학파’로 분류된다.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며 대중적 인기도 얻은 슬라보예 지젝이 슬로베니아 학파의 일원이다.
이날 특강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출판사 후마니타스가 마련했다. 살레츨 교수는 이달 3일 서울시립대에서 열린 도시인문학 국제학술대회 참석해 ‘테러의 시대, 도시의 불안’을 주제로 발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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