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일본인이 그린 임진왜란은 어떤 모습일까

근세 일본인이 그린 임진왜란은 어떤 모습일까

입력 2014-06-12 00:00
수정 2014-06-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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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찾아온 에도(江戶) 막부 시대에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다양한 책이 출간됐다. 임진왜란이 663년 백촌강(한국의 금강) 전투 이후 근 1천 년 만에 일본이 외국에서 벌인 전쟁이다 보니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았다. 당시 출판인들이 독자들의 이런 소비심리를 놓칠 리 없었다.

이 시기 발간된 임진왜란 문헌의 특징은 삽화가 다수 수록됐다는 점이다. 목판인쇄술과 출판시장이 발달하고 있었지만, 필사본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여전히 엘리트 계급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자해독률이 별로 높지 않은 중하급 무사,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급의 독자를 겨냥해 삽화가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 연구에 몰두해 온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는 당시 책들에 실린 삽화에서 조선과 대외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에 주목했다. 수많은 삽화를 살펴본 그는 최근 출간한 ‘그림이 된 임진왜란’(학고재)에서 이 그림들의 의미를 소개했다.

저자는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였던 ‘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란 관련 문헌 가운데 처음으로 삽화를 대량 수록한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를 비롯해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 ‘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등을 연구 자료로 삼았다.

이들 문헌에는 의외로 전쟁 당시 크게 활약한 조선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이를 인용한 책이 일본에서 다수 출간됐기 때문이다. 징비록이 유입되기 전에는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한 부대가 조선군이 아닌 명(明)군으로 그려지는 ‘오보’도 있었다.

조선의 이런 ‘전쟁영웅’들에 대한 일본 문헌들의 평가는 징비록과 큰 차이가 없다. 이를테면 이순신은 일본인의 눈에도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자 모함을 받았다가 전장으로 복귀하는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조선정벌기’에 수록된 삽화에는 전투 중 팔에 맞은 총탄을 빼내 피가 솟구치는 가운데서도 태연자약한 이순신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전쟁 기록에서 종종 나타나는 신화·종교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태양의 아들’로, 임란 당시 왜군을 지휘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호랑이 잡는 장수’로 묘사된다. ‘에혼 다이코기’에는 조·명 연합군이 관우의 힘을 빌려 일본군을 물리치려 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임진왜란 통사(通史)’를 표방한 책은 아니지만, 전쟁 발발부터 조선-일본 간 강화협상과 결렬, 이후 왜군이 재침략한 정유재란 등 전쟁 전후의 전반적인 과정도 다양한 삽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고문헌을 연구하면서 이들 문헌에 실린 삽화만으로 7년 전쟁의 거의 모든 국면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며 “이처럼 방대한 삽화들이 한일 양국 학계에서 외면받고 일반 저술계에서 자의적으로 이용되는 현실은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한다. 360쪽. 1만7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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