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팬들이 마련해준 40주년 기념 공연 개최
“우리 대표곡 ‘화(和)’와 ‘영화를 만나’에 등장하는 ‘화’와 ‘영화’는 동일 인물이자 제 아내죠. 사람들이 그 점을 궁금해하더군요. 하하.”(백순진.62, 이하 백)”금융인으로 살며 대머리가 될 위기였는데 팬들과 다시 소통하자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했어요. 껄껄.”(김태풍.59, 이하 김)
말쑥한 정장 차림의 두 신사는 ‘비밀 아닌 비밀’을 한 가지씩 털어놓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국내 싱어송라이터 1세대인 남성듀오 ‘사월과오월’의 멤버 백순진과 김태풍을 최근 종로구 서린동에서 만났다.
1971년 결성해 이듬해 첫 음반을 발표한 사월과오월은 번안곡이 유행하던 1970년대 ‘화’ ‘옛사랑’ ‘바다의 여인’ ‘님의 노래’ 등의 창작곡을 히트시킨 팀이다.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은 이들은 다음달 2일 오후 7시30분 성동구 행당동 소월아트홀에서 40주년 기념 공연을 개최한다. 팬카페 ‘사오모(사월과오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2천500여 명이 마련해 주는 의미 있는 자리다.
다음은 두 사람과의 문답.
--40주년 공연을 여는 기분은.
▲40년이 흘러 우리가 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행복이다. 3년 남짓 활동하다가 1975년 헤어져 각자 다른 길을 걸었으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백, 김)
--음반 넉 장을 내고 팀이 해체된 배경은.
▲내 문제가 컸다. 사월과오월로 활동하던 중 내가 한번 팀을 나갔다. 그때 김정호와 백 선배가 2-3개월 같이 했다가 내가 다시 들어갔는데 음악 하는 게 식상해졌다. 공부하고 군복무 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김)
▲태풍이는 그전에도 유학을 가겠다고 수없이 관둔다고 했다.(백)
--이후 두 멤버 모두 해외 생활을 오래 했는데.
▲처음에는 국내에서 ‘오토 프로덕션’을 설립해 신인 발굴과 음반 기획을 했다. 각종 광고의 CM송 100여 편도 작곡했고 사월과오월의 후기 멤버들을 뽑아 ‘장미’란 노래도 히트시켰다. 기획사가 흑자였지만 사기를 맞아 도산했고 이 계통에 환멸을 느꼈다. 부친 사업에 참여하며 미국 뉴욕에 거주했고 2006년 귀국, 현재 유나이티드 항공 총 대리점인 ㈜샤프의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백)
▲오스트리아 유학길에 오른 뒤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을 전공, 시티은행에 입사했다. 1982년 국내로 파견됐다가 1985-8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메리카 뱅크에 근무했고 1990년대에는 프랑스 은행 크레디아 그리콜의 한국 대표도 맡았다. 한국에 정착한 건 2003년으로 현재 영창 파트너즈 대표로 일하고 있다.(김)
--팀 활동이 재개된 배경은.
▲2005년 12월 팬카페인 ‘사오모’가 만들어졌고 광화문에서 팬들과 만난 게 계기였다. 그중 ‘초록’이란 아이디를 가진 팬이 1972년도에 우리가 해준 사인을 갖고 있어 감동적이었다.(김)
--두 사람은 서로 첫인상이 기억나나.
▲1971년 낙원상가 악기점에서 소개해줬다. 백 선배는 마르고 ‘핸섬’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기타를 가르쳤지만 백 선배는 나와 ‘레벨’이 달랐다.(김)
▲태풍이는 귀공자 타입이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목소리도 보석으로 치면 진주가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귀티가 났다.(백)
--음악인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집안에서 반대하진 않았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영창피아노를 설립했고 집안에서 유니버설레코드도 운영했다. 누나는 한국 최초의 음악 박사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고 난 어린 시절부터 각종 악기를 배웠다. 음악 하는 환경은 갖춰진 셈이었다.(김)
▲집에서 엄청나게 반대했지만 중앙대 작곡과에 들어갔다. 방송 등에 출연하자 학장이 학교를 나가라더라. 사정한 끝에 연극영화과로 졸업할 수 있었다.(백)
--사월과오월이 처음 결성할 때는 백순진과 이수만이 멤버였는데.
▲대학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를 치던 이수만 형의 소개로 1971년 이수만을 만났다. 다방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노래를 잘하더라. 첫 음반 녹음 후 이수만이 건강 문제로 빠지는 통에 음반 트랙에는 태풍이가 부른 곡이 없는데 재킷에는 나와 태풍이 사진이 실렸다. 하하.(백)
--그런 이수만이 지금 ‘K팝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수만과는 미국에서 자주 만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래 비전만 얘기하더라. (SM 가수들이) 파리에서 K팝 공연했듯이 이수만은 꿈꾼 생각들을 현실로 이뤄냈다. 큰 훈장을 받을 만하다. 지금 군대 간 내 아들이 열다섯 살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SM 오디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하하.(김)
--번안곡이 유행하던 시절, 창작곡을 선보인 이유는.
▲당시 트윈폴리오, 라나에로스포, 쉐그린, 아도니스 등 외국어로 된 그룹명이 많아 우리말로 팀 이름을 지은 건 독특했다. 영향을 준 비틀스처럼 내 음악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딩동댕 지난 여름’에 국악을 가미했고 ‘님의 노래’ 등의 곡에선 김소월의 시를 가사에 담는 연구도 했다. 요즘 댄스곡은 외국곡의 ‘카피’이지 정체성이 없다. 나도 진정한 내 음악의 단계를 완성하지 못한 한이 있다.(백)
--몇몇 곡은 왜 금지곡이 됐나.
▲’화’의 가사에서 ‘미친듯이’라고 쓰고 싶은 부분도 심의를 고려해 ‘애태우며’로 바꿨다. 그런데 데모에 영향을 줄 만한 가수들의 노래는 다른 이유를 대서라도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화’는 표절이라더라. 지금도 뭐가 표절인지 모르겠다.(백)
--당시 어느 정도 인기였나.
▲트로트 일색이던 때 청소년과 대학생들 사이에 세시봉의 포크 음악이 인기였고 우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남진쇼’에서 함께 공연했고 ‘0시의 데이트’ 등 주로 심야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는데 팬들이 엽서를 5-6m씩 병풍처럼 보내줬다. 젊은층은 통금이 지나면 트랜지스터로 우리 음악을 들었다. 당시 그들 삶의 일부였다.(백, 김)
--세시봉 가수들이 재조명 받는 분위기도 반갑겠다.
▲실버 세대가 늘어나는데 방송 매체는 아이돌 가수 중심으로 돌아간다. 중장년층 문화도 필요하니 우리도 세시봉 선배들처럼 중장년층을 위해 일익하고 싶다.(백)
--백순진은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장인데 싱어송라이터들이 저평가됐다고 여기나.
▲돈벌이를 위한 노래와 아티스트의 노래는 차별화돼야 한다. 이를 구분하는 환경이 돼야 좀 더 실험적이 노래들이 나온다. 미국의 재즈, 프랑스의 샹송, 일본의 엔카 같은 대표 음악이 한국에는 없다.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숙원은 지금도 있다. 그래야 한류도 지속한다.(백)
--이번 공연은 어떻게 꾸미나.
▲우리의 대표곡을 선보인다. 또 KBS 2TV ‘톱밴드’에 출연했던 그룹 포(POE)가 게스트로 참여한다. 앞으로도 자선 취지의 좋은 무대에 설 것이다. 일종의 재능 기부를 하고 싶다.(백, 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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