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광고 엿보기] 식도원 사건

[근대광고 엿보기] 식도원 사건

손성진 기자
입력 2021-02-07 17:30
수정 2021-02-0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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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4년 12월 6일자에 실린 식도원 확장 광고.
매일신보 1924년 12월 6일자에 실린 식도원 확장 광고.
일제강점기 최초의 전문 음식점은 명월관으로 궁궐 요리사 출신 안순환이 1909년 서울 광화문에 열었다. 1918년 명월관에 불이 나자 안순환은 명월관 명의를 이종구에게 넘기고 인사동에 태화관을 차렸다.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어느 학원 강사가 태화관이 룸살롱이었다고 말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었다. 일제가 독립운동의 성지(聖地)가 된 태화관을 가만둘 리 없었다. 태화관 영업이 정지되자 안순환이 남대문통 1정목(남대문로 1가)에 1922년 다시 개원한 음식점이 식도원이다. 위치는 현재의 신한은행 광교빌딩 자리다.

찾는 이들이 늘어나 사업이 번창하자 안순환은 확장 공사를 해 1924년 12월 완공하고 광고를 냈다. 광고 내용을 보면 2층 건물에 건평이 200평이 넘는다고 돼 있다. 2층 대광실(大廣室)은 1000명이 동시에 입식(立食) 연회를 열 수 있고, 앉는 연회도 500명이 참석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유명한 중국요릿집이었던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듯이 식도원에서도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한글 반포 480돌인 1926년 11월 4일 최현배 등 한글학자들이 모여 가갸날(한글날)을 제정해 발표한 곳도 식도원이었다(한글날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후 10월 9일로 수정).

1924년 총독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건달 박춘금을 불러들여 ‘각파유지연맹’이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도록 사주했다. 깡패들을 동원한 언론 탄압이 목적이었다. 그해 3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식도원에서 박춘금 일당에게 포박돼 권총으로 협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가 각파유지연맹 결성을 사설로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협박을 못 이긴 송진우는 “인신공격은 유감이었다”는 사과에 가까운 쪽지를 써 주었고 김성수도 그들의 요구대로 거금 3000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나왔다.

다음달 안재홍 등이 총독부의 비호 아래 벌어진 ‘식도원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지만 강제로 해산당했다. 매일신보는 송진우가 건넨 쪽지를 서약서라며 동아일보를 공격했다. 동아일보는 사건 전말을 밝히는 기사를 4월 11일자로 내보내며 반박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유야 어떻든 민족 대변지를 자처하는 신문사 사장이 총독부 끄나풀에게 사과하고 친필로 쪽지를 써 준 것은 품위를 떨어뜨린 일이라는 것이었다. 편집국장 이상협은 송진우를 비판하며 사표를 내고 퇴사했으며 여러 간부들도 이상협을 따라 회사를 떠났다. 송진우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2021-02-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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