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북학과 숭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북학과 숭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4-06-19 00:00
수정 2014-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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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學> <崇美>

조선 후기 인물들 가운데 현실 비판과 개혁안을 매우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라면 박제가(1750~1805)를 빼놓을 수 없다. 중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그를 박지원(1737~1805)과 함께 북학파의 대표주자로 치켜세우면서 그가 제기한 갖가지 개혁방안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한다. 특히 그가 강조한 상공업 진흥책이 1960년대부터 30년가량 진행된 산업화 시기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박제가는 마치 근대의 혜안을 지닌 인물로 이미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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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그러나 박제가만큼 외국 문물을 흠모하고 조선의 후진성을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낸 이도 드물다. 박제가의 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주제마다 먼저 청나라의 상황을 크게 칭송하고 나서 조선의 현실을 대비해 비난한 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어투를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나라에 대해서는 칭송 일변도이고 조선에는 비난 일색이다. 심지어 조선의 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불편하니 아예 문자(한문)뿐 아니라 말도 중국을 따르자는 글을 읽노라면, 박제가가 혹시 조선은 부끄러워하면서 중국을 맹종한 ‘중국마니아’는 아니었을까 의심이 솟구친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박제가에게 돌을 던지기는커녕 그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두 나라의 사정을 비교한 그의 글이 매우 사실적일 뿐 아니라, 그 대안도 상당히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관찰한 청나라 상황은 북경을 오가며 우연히 접한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박지원과 함께 밤을 새워 고민하고 탐구한 내용을 연행 길에 직접 확인하고 경험한 것이기에, 그런 사실성과 구체성을 갖출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조선사회의 풍요를 바라는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글의 행간에서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좀 심하다 싶은 그의 비판이나 비난일지라도,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진정성이 어느덧 읽는 이의 온몸을 휘감아 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청나라를 배우자고 외친 것이다.

요즘 국무총리 후보자가 이전에 행한 거의 망언 수준의 강연 내용이 공개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논란이 불거지자 총리 후보자 측에서는 문제가 된 동영상 전체를 보고 평가해 달라며 일종의 정공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 강연 중의 발언들이 정말로 망언이라는 점이 더 확실해지고, 단순히 남의 글을 인용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확신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같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는 아예 애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떠나버린 애인에 대한 애증이나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애증이 바로 그런 예다.

조선이 근대의 문턱에서 좌초해 몰락한 것은 사실이므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조선에 대한 애(愛)와 증(憎)이 뒤섞인 속마음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런데 총리 후보자의 강연에는 애가 없고 증만 있다. 진지한 고민에 따른 현실 진단과 개혁안은 없고, 미국과 일본 덕분, 심지어 신(神) 덕분이라는 ‘덕분사관’뿐이다. 그러니 건설적인 학(學)은 없고 종교적 맹신 수준의 숭(崇)만 넘친다. 말이 필요 없는 수준 이하요, 후안무치다. 아마도 ‘증병’(憎病) 말기증상인가 보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2014-06-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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